둥굴레차 티백과 카키색 양산 — 혜화동 여자 노숙인
인생의 바닥에서 기록한 묵상
혜화동 노숙인
혜화동에 지내면서
요즘 자주 마주치는 여자 분이 있습니다.
이분을 처음 뵌 것은 올해 초였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역 입구에 이분이 홀로 서 있었습니다.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노숙인이었습니다.
보기에 안타까웠지만,
도와줄 돈도 없고
저도 서둘러 가야 했기 때문에
그냥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사실 저에게 4만 원이 있었지만
3만 원은 교통카드 충전할 돈이었고
나머지 만 원 중에 오천 원은
뚝섬역 근처 CU편의점 앞에서 호떡을 살 돈이었습니다.
CU편의점에 가면
10% 할인을 받을 수가 있어서
거기서 점심으로 삼각김밥을 사곤 했는데
갈 때마다 편의점 앞에 호떡을 파는 청각장애인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늘 손님이 없어
하염없이 앉아 계신 모습이 안타까워
호떡 5개 사서 지인 카페 분들과 나눠 먹으려고 벼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노숙인께 드릴 수는 없었고
그냥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내 갈 길 갔을텐데,
그날은 다 내려간 계단을 다시 뒤돌아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노숙인 여자분에게 가서
여기서 뭐하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이분의 때 묻은 손에는
티백이 여섯 개 정도 있었고
둥굴레차 티백 낱개 하나를 천 원에 파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갖고 있던 만 원을 드리고
티백을 한 개 받았습니다.
미안해하시며 나머지 티백도 주시려 했지만
그냥 티백 한 개만 받아 왔습니다.
그 둥굴레차 티백 한 개를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지금 나도 완전히 망해서
남을 돕기는커녕
내 자신도 돌볼 수 없는데…“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내일 또 저분을 본다면,
그땐 시선을 피하고
그냥 지하철로 내려가야겠다“
내 마음의 필수재
며칠 후,
이번에는 집 근처를 걷다가
이분을 동네 마트 앞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마트 앞에 계신 것 같았고
근처 떡집에서 떡을 사서 드렸더니
“나는 떡을 이미 먹었고 배가 부르니,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안 돼요?”라고 하셨습니다.
“돈 아끼려고 아이스크림은 나도 안 사 먹는건데…”
“밥은 필수재이지만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은 필수재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스크림은 사드릴 수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집에 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필수재만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누울 수 있는 방 한칸
최소한의 식량과 물
옷 한 벌만 주시고
그 이상은 필수재가 아니니 줄 수 없다고 하시면 나는 어떨까?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사드리러
마트로 갔지만
아까 계시던 노숙인은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도 찾아 보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사드려야 했기에
동네를 다닐 때마다
항상 주변을 살폈지만
여자 노숙인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내린 순간
그 정류장 의자에 이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식사는 하셨는지 물었고
지난번에 아이스크림을 못 사드려 죄송했다고 말씀드려며 혹시 드시고 싶으신지도 여쭤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밥도 먹어 배가 부르고
아이스크림 생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다 거절하시고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홀로 의자에 앉아 심심해 하시는 것 같아서
말동무라도 되어 드리려고
옆에 앉아서 얘기를 건냈습니다.
그런데 정색을 하시며
“난 당신 모르니까 나한테 말 시키지마요!”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무안하기도 하고
더 이상 말을 거는 게 실례인 것 같아서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걷는 내내 고민이 됐습니다.
난 할만큼 다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뭔가 놓친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니.. 저분이 예수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은 식사도 하셨고
아이스크림 생각도 없으시지만
내일은 밥이나 간식 먹을 돈이 필요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꼬깃꼬깃 접은 만 원를 말 없이 드렸습니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근처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장을 보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이 분이 그 앞에 서 계셨습니다.
혹시 먹을 걸 사러 오신 건가 해서 뭐 필요하신지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아까 큰 돈을 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왠지 앞으로 이분과
자주 마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자주 마주치고 있습니다.
카키색 겉옷과 카키색 양산
하루는 밤에 길을 걷는데
이분이 문 닫은 동네 상점 앞에 앉아서 밤바람을 쐬고 계셨습니다.
제가 인사드리니
제 얼굴을 알아보시고 살짝 웃으셨습니다.
이분이 저를 알아보시는 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식사하셨는지 여쭤보니 드셨다고 하셔서
왠지 간식으로 과일을 드리면 좋겠다 싶어 마트에 갔습니다.
서로 다른 가격의 방울 토마토가 3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예쁘고 좋은 걸 샀습니다.
그리고 노숙인에게 가서 방울 토마토를 드렸는데, 또 거절을 당했습니다.

정색을 하시면서 싫어하셨는데
저는 또 무안해져
하는 수 없이 토마토를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자꾸 거절을 당하니
이제는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체 할 수도 없어
요즘에는 마주치면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제 머리를 자르고 나니
이제는 이분이 저를 못 알아보시는데
그래도 마주치면 항상 인사를 드립니다.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멀리 계신 것을 본 것도 여러 차례 있습니다.
더운 여름 밤에는
시원한 은행 ATM 건물 안에 계셨고
비 오는 날에는
상점 천막 아래에서
이분만의 리듬을 타며
좌우로 고개를 흔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씨에도
항상 똑같은 카키색 겉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며칠 전에도
이분을 마주치자 인사를 드렸는데
저를 알아보시고 살짝 시크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인사만 드리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이분이 먼저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저 양산 좀 사주시면 안 되요?
네 사드릴께요.
양산 어디서 파나요?
저기 편의점에라도 가볼까요?
그런데 새 양산을 사 달라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양산을 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가득 찬 가방 속에
꽁꽁 묶은 비닐봉지를 풀며
양산을 꺼내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남자라 양산이 필요 없어요. 안 꺼내셔도 돼요”
라고 말씀드리고
이분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하나 넣어드리고 재빨리 횡단보도로 향했습니다.
이분이 가방 안에
꽁꽁 묶은 비닐봉지에서
양산을 꺼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신호등 신호 바뀌는 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제가 신호를 기다리는 그 사이에 이분이 양산을 꺼내 들고 오셨습니다.
“저 정말 양산이 필요 없어요. 안 주셔도 돼요”
라고 했지만
“그냥 좀 가져가요!”
라며 이분이 때를 쓰셨습니다.
양산을 받는 게
이분을 배려하는 것 같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습니다.

이분 겉옷처럼
카키색 중고 양산이었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양산
졸지에 제게는 양산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