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침공으로 모든 것을 잃고 철저히 무너져 내린 유다의 폐허. 에돔마저 조롱하며 삼키려 했던 그 텅 빈 공백 속에, 성경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의 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절망에서, 왜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 진실을 나눕니다.
[겔29:1-16]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여호와를 향하여
위기의 순간 나를 구원할 것 같던 세상의 힘은 무력한 갈대 지팡이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고난을 피하고자 피조물을 의지했던 미련을 이제 끊어냅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광야의 시간일지라도 억지로 피하지 않고, 거짓 우상을 등진 채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 온 마음을 고정합니다.
[시112:1-10] 내 영혼을 향한 선포, 할렐루야!
시편 112편에 “전심으로 찬양하라”는 할렐루야의 명령 앞, 지치고 무기력한 제 영혼을 봅니다. 찬양할 힘조차 없는 연약함뿐이지만, 다시 제 영혼을 일깨워 주를 경외하는 말씀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고전 4:9-21] 내 시선이 다시 십자가로 향할 때
“나를 본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온전한 헌신 앞, 한없이 작아지는 저를 봅니다. 용기도 자신도 없지만 내게 남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다시 시선을 십자가로 향합니다.
[고전 1:18~25]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99세 할머니께 복음을 전한 실제 기록입니다. ‘구주’, ‘영접’ 등 종교적 용어의 장벽 앞에서 복음을 전달한 과정과, 인간의 실패를 하나님의 지혜로 사용하는 주권적 섭리를 기록하였습니다.
[룻기 1:15-22] 할머니 병실 앞에서 마주한 헤세드
룻기의 ‘헤세드’는 상대의 상태와 무관하게 언약을 끝까지 이행하는 책임입니다. 본문은 룻의 헌신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확인된 이 원리를 할머니를 향한 복음 전파와 치열한 선교 현장에 적용합니다.
[룻기 1:1-14] 아무도 기도해주지 않는 영혼…
복음을 전하러 찾아간 할머니를 향한 기도와 긍휼함이 부족했음을 회개하며 룻기 1장을 묵상합니다.
영적 기근과 절망의 모압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저희 가족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와 섭리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시 105:1-22] 절벽 끝에서 묻습니다,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 명령은 감정의 호소가 아닌, 하나님의 행하신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어 시인하는 ‘야다(יָדָה)’의 결단입니다. 다윗이 구가한 영광의 찬양이 훗날 모든 것이 무너진 포로기 폐허 속에서 ‘역대기’의 기록으로 재소환되었다는 역설은, 오늘날 절벽 끝에 선 저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다음 주면 닥칠 경제적 단절과 할머니의 위중함, 그리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선 비참한 현실. 이 처절한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행하심(Fact)’ 그 자체를 먼저 선포하려는 작은 청년의 몸부림을 담아 기도합니다.
[시 102:17-28] 통장 잔고는 바닥인데, 가슴에는 ‘민족’이 담기는 역설
[생명의 삶: 시편 102편 17-28절] 실업과 채무라는 ‘빈궁함’의 현장에서, 개인의 탄식이 민족의 소망으로 확장되는 성경적 구조를 봅니다. 현재의 고난이 개인의 회복을 넘어, 열방과 북녘 땅을 살리는 통로가 되기를 간구하며 오늘을 견뎌냅니다.
[시 102:1-16] 나는 광야의 올빼미처럼…
[생명의 삶: 시편 102편 1-16절]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완전히 뒤처져 버린 듯한 두려움, 홀로 광야의 올빼미처럼 고립된 제 처지가 이 말씀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비록 눈물 섞인 물을 마시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주의 정한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을 믿으며 이 작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나타나기를 간구합니다.